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블로거는 기억을 남긴다. 기억은 기록이 된다. 기록은 역사가 된다. 이곳에 올려진 광고와 홍보 내용은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Since 2009.04.04 밝은터
« 2010/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Google Book Search

www.flickr.com
This is a Flickr badge showing public photos and videos from ICCsports 사진 업데이트 중. Make your own badge here.

믹시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믹시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MLB 30개 구단 역사(5)] 탬파베이 레이스

연재/MLB 30개구단 역사 | 2010/01/05 16:22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1998 창단한  탬파베이 레이스(당시에는 데블레이스였음) 2008년까지 번도 5 시즌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시즌 동안 최고 승수는 2004년에 기록한 70(91)이었다. 명장으로 불리는 피넬라 감독을 영입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팀은 여전히 4 승률에 머물렀다. 2007 시즌에도 66(96) 챙기는 그쳤던 탬파베이의 2008 상승은 놀라운 일이었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PicApp

UPI POY 2008 - Sports
조 매든 감독


탬파베이는
1900 이후 처음으로 전년에 최저 승률을 기록한 이듬해에 메모리얼 데이(미국의 현충일)까지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한 번째 팀으로 기록됐다. 탬파베이의 2008 성적은 9765.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탬파베이는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했고 최종 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넘어서지 못하고 14패로 시리즈를 마감했다.

월드시리즈 진출팀인 탬파베이에는 뚜렷한 스타가 없었다. 선발 투수 대부분 자책점이 3 중후반대이었고 주전 타자 타율이 3할대인 선수도 없었다. 탬파베이의 연봉은 5천만 달러도 되지 않았다. 43백만 달러가 연봉이었던  탬파베이는 플로리다 말린스(2265 달러) 이어 연봉 순위가 바닥에서 2위에 있다. 연봉 1위인 뉴욕 양키스( 2 달러) 비해 5분의 1, 연봉 2,3위인 뉴욕 메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비교하면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은 연봉으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이 됐다는 사실은 대단했다.

리그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는 투수와 타자가 없는데도 레이스가 선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수비와 불펜 투수들의 커다란 기여 덕분이다. 불펜 투수를 살펴보면 마무리 전문 트로이 퍼시벌(아래 사진)이 28세이브로 선전했고 윌러(13세이브), 트레버 밀러,  J.P. 하월이 뒷문과 중간문을 지켜줬다.

MLB: Minnesota Twins at Tampa Bay Rays

수비는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레이스의 내야 수비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내야 수비의 핵은 일본 출신의 2루수 이와무라 아키노리였다. 이와무라는 유격수 제이슨 바틀렛과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로 리그 최고의 병살 짝꿍 됐다. 이와무라를 3루에서 2루로 이동케 신인 이반 롱고리아도 견고한 수비로 탬파베이의 수비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불펜 투수들의 호투와 견고한 수비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이 탬파베이는 미래의 전망이 밝은 팀이다. 레이스는 2009시즌에는 84승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2 연속 5 승률로 가능성이 있는 팀임을 보여줬다.

탬파베이 레이스는 한국 선수들과도 연관이 있는 구단으로 서재응, 최희섭, 류제국 등이 팀의 유니폼을 입었다.



탬파베이는 플로리다주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근거지로 하는 구단이다.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동부조에 속했으며 같은 조에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있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어려운 하나다. 구단은 워낙 많은 돈을 쏟아붓기 때문에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탬파베이의 2008 시즌은 전설적인 시즌이었다고 있다.

2007 구단의 구단주인 스튜어트 스턴버그는 구단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데블 레이스라는 닉네임을 레이스로 수정했다. 데블(악마)이라는 이름이 부담이 됐던 것이다.

레이스는 1998 창단 때부터 트로피카나 필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RAYS-TIGERS

탬파베이에서 명장이 매든(Joe Maddon) 감독은 2008 레이스에 기적과 같은 9765패의 놀라운 성적으로 이끈 지도자다 매든의 리더십이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매든은 선수 시절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던 인물이다.  에인절스 구단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줄곧 포수로 활동하며 무대에 나가지 못했던 매든은 은퇴 주로 벤치 코치로서 활동했다. 그가 31 동안 일했던 직장은 에인절스 구단이었다. 에인절스 구단의 벤치 코치로 활동했던 매든은 1996년과 1999 에인절스에서 임시 감독 역할을 맡은 적이 있지만 정식 감독으로서는 레이스에서 데뷔했다. 2006년이 그가 정식으로 감독 데뷔를 해다. 해에 61101패를 기록한 매든은 이듬해에도 6696패를 기록해 해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레이스는 워낙 연봉이 낮은 팀이라 아무도 그를 욕하지 않았다. 

2007  최악의 성적을 냈던 레이스가 어떻게 올시즌 최고의 아메리칸리그 팀이 됐을까. 선수들과 전문가들은 매든의 리더십이 중요한 요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매든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야구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감독으로서 굉장히 자유분방하면서도 굉장히 고집이 세다. 선수들로하여금 감독에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게 하면서도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을 받아도 실행에 옮기는 스타일이다. 그는 감독으로 부임했을 선수들에게 "마음 속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라" 강조했고 선수들은 감독에게도 서슴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선수들이 눈치를 보지 않았던 것이다.

마무리 전문 트로이 퍼시벌이 강판당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계속 말할 있었던 것도 그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든은 일단 마음 속에 결심을 하면 결심을 바꾸지는 않는다. 선수들로하여금 의견을 쏟아놓게는 하지만 감독의 결단에는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은 그가 결단하기 전에 말을 해야 영향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선수들이 말을 있도록,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있도록 것은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던 것이 분명하다. 레이스는 결속력이 강한 구단으로 손꼽힌다.

Texas Rangers vs. Seattle Mariners

다시 매든 감독의 결단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와 관련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2008 정규시즌 텍사스와의 경기였는데 만루의 위기에서 타석에는 MVP 후보였던 조시 해밀턴(위 사진)이 나섰다. 만루의 상황에서는 무조건 정면승부를 하는 원칙이지만 매든 감독은 투수에게 그를 고의사구로 내보내도록 지시했다. 텍사스는 밀어내기로 1점을 올렸는데 결과적으로는 매든 감독의 결정이 옳았다. 상황에서 안타를 맞아 2 또는 3점을 내주는 것보다는 1실점이 낫다고 매든은 판단했던 . 레이스가 승리해 그의 결정은 '현명했음' 인정받았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결단력은 정도다. 만루의 상황에서 고의사구를 지시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통계 야구가 주를 이루는 21세기에 매든 야구는 일종의 ''으로 하는 야구 ''으로 하는 야구로 좋은 결과를 냈다. 선수들이 그의 스타일을 따를 것인가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매든 감독 자신도 선수들이 따라줄지 염려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좋다. 매든 감독을 보면서 세상의 리더십 스타일에는 정답이 없음을 있다. 가지 확실한 것은 '뜨거운 열정' 있는 사람은 대체로 좋은 결과를 얻는 있다. 매든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가 되는 (unity).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자세(attitude) 모든 것을 결정한다."

탬파베이 단장과의 인터뷰

2008 ALCS Game 7
2008 ALCS Game 7 by mookiefl 저작자 표시비영리

2007
214 레이스 단장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에는 데블레이스로 불렸다.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의 부사장 구단 운영 총책임자인 앤드루 프리드먼은 밝은터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팀의 한국 선수들에 대해 흥미로운 평가를 했다.

 프리드먼은 "한국 선수를 3명이나 영입한 것에 마케팅 전략이 있는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 선수들을 능력에 따라 평가했고 한국 선수들은 우리의 평가 기준에서 좋은 선수로 분류돼 영입이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데블레이스의 선수에 대해 평가를 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상세히 설명을 했다.

 먼저 1루수 최희섭(당시 27세) 대해서 프리드먼은 "과거 기록이 좋은 선수다. 지난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냈지만 그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bounce back)으로 기대한다. 그를 영입할 있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말했다. 기자는 "데블레이스에 좋은 1루수감이 많은데 최희섭이 25 명단에 들어갈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에는 정규 시즌을 25 명단에 들어가서 시작할 같다" 답했다. 조 매든 데블레이스 감독은 최희섭이 1루수가 되지 못하면 지명타자(DH) 기용하겠다는 의지를 언론에 공개한 있다.

 프리드먼은 투수 서재응(29) 극찬했다. 그는 "다저스에서 서재응을 영입한 그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득점 지원만 제대로 됐더라면 많은 승수를 쌓았을 것이다"라며 만족해했다. 그는 이어 "서재응은 승리욕이 강하고 동료와 아주 지낸다. 그는 우리의 확실한 선발 투수다"라며 칭찬 릴레이를 이어갔다. 서재응은 지난 시즌 데블레이스에서 16경기에 선발 등판한 있다. 탬파베이에서 그는 18패에 그쳤지만 타선 지원이 있었다면 승리할 있었던 경기수가 무려 8경기나 됐다. 그러나 던지는 날과 던지는 날의 편차가 심한 편이었다. 

 투수 류제국(23) 대해 프리드먼은 "역시 과거 기록이 좋은 선수다. 악명 높은(notorious) 퍼시픽 코스트 리그 타자를 상대로 평균 이상의 기록을 냈다. 좋은 투수다. 5선발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일 것이다. 그를 우리의 선발 투수감이라고 생각하고 영입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루 전날 MLB.com과의 인터뷰에서는 "여러 스카우트들을 통해 류제국을 점검했고 그들은 합격점을 내렸다. 류제국은 평균 이상의 4가지 구질을 가지고 있다" 만족감을 표명한 있다.

[프리드먼은 누구?]

 


앤드루 프리드먼은 지난해 11 야구팀 운영 책임자가 됐다. 전에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중요한 운영을 맡았던 그는 지난 2005 3 크로포드와 장기 계약을 맺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데블레이스에 오기 전에 뉴욕의 투자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던 프리드먼은 야구 선수 출신이다. 툴레인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 야구 선수였던 그는 손목과 어깨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고 이후 공부에만 집중해 경영/재정을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는 선수 시절 외야수였다. 휴스턴 태생인 그는 현재 탬파시에 거주하고 있다.

 

월드시리즈 진출했던 해 밝은터가 쓴 기사

탬파베이 레이스가 보스턴 레드삭스 격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레이스가 레드삭스를 누르면 구단 창단 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레이스하면 생각나는 선수는 서재응, 최희섭, 류제국 등이다.

지금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서재응은 레이스에서 잠깐 에이스급 투수로 활동했으나 타선 지원 부족으로 많은 승수를 올리지 못한 기억이 있다. 최희섭은 레이스 단장이 야심차게 영입했으나 이렇다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류제국은 올 시즌 레이스 유니폼을 입고 1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레이스는 올 시즌 메이저리그 야구(MLB)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돌풍은 ‘임시’라는 딱지가 붙었다. 시즌 후반부에는 레드삭스나 뉴욕 양키스에 역전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는 레이스에 뚜렷한 스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발 투수 대부분 자책점이 3점 중후반대였고 주전 타자 중 타율이 3할대인 선수도 없었기에 레이스의 돌풍은 얼마 후에 꺾일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즌이 시작했을 때 탬파베이의 팀 연봉은 5천만 달러도 되지 않았다. 약 4천3백만 달러가 팀 연봉인 탬파베이는 플로리다 말린스(2천2백65만 달러)에 이어 팀 연봉 순위가 바닥에서 2위였다. 팀 연봉 1위인 뉴욕 양키스(약 2억 달러)에 비해 약 5분의 1, 팀 연봉 2,3위인 뉴욕 메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비교하면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은 연봉으로 레이스는 상위권에 올랐다.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레이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까지 올라 레드삭스에 3승1패로 앞서 있다. 1승만 보태면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리그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는 투수와 타자가 없는데도 D-레이스가 선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감독의 지도력이 뛰어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와 관련된 글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다. 

다른 요인을 찾아보면 수비와 불펜 투수들의 커다란 기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불펜 투수를 살펴보면 마무리 전문 트로이 퍼시벌(38)이 28세이브에 4홀드로 선전했고 댄 윌러(13세이브. 26홀드), 트레버 밀러(2세이브. 11홀드), J.P. 하월(3세이브. 14홀드)이 중간문과 뒷문을 잘 지켜줬다. 특히 윌러(30)는 피안타율 1할8푼3리, 피출루율 2할5푼으로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퍼시벌이 등판하지 못했을 때 윌러는 무려 13세이브나 따냈다.

 수비는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탬파베이는 정규 시즌에 에러 90개만을 기록, 최소 에러 부문 상위에 올랐다. 레이스의 내야 수비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내야 수비의 핵은 일본 출신의 2루수 이와무라 아키노리(29). 이와무라는 올 시즌 152경기에 출전, 실책을 단 7개만 범했다.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활약한 후 지난 2007년부터 레이스 유니폼을 입은 이와무라는 올 시즌부터 2루수로 뛰었는데 이 팀의 유격수 제이슨 바틀렛과는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로 리그 최고의 병살 짝이 됐다. 이와무라가 올 시즌 만들어 낸 병살은 무려 109개다. 이와무라를 3루에서 2루로 이동케 한 신인 이반 롱고리아(22)도 견고한 수비로 탬파베이의 수비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불펜 투수들의 호투와 견고한 수비로 리그 최고 승률 팀이 된 탬파베이는 타선의 지원을제대로 받지 못했다. 주전 선수 중 3할 타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레이스 타자들은 포스트시즌에 들어가자 모두 강타자가 됐다. 카를로스 페냐(4할, 홈런2개, 6타점), 윌리 아이바(3할9푼1리, 홈런 1개, 6타점), 칼 크로포드(3할7푼5리. 6타점), 이와무라(3할6리, 홈런 1개, 4타점), B.J. 업튼(2할9푼4리, 홈런 5개, 10타점), 에반 롱고리아(2할8푼1리, 홈런 5개, 9타점) 등 정규 시즌의 부진을 말끔히 씻었다. 팀 타율 2할9푼2리에, 홈런 16개를 때려냈으니 레이스의 타선을 무서운 수준이었다.

 레이스는 선발 투수들이 대체로 부진한 상황에서 좌완 투수 스캇 카즈미어(24)가 지난 5월초에 복귀해 호투한 것에 큰 힘을 얻었다. 또한 전 LA 다저스 유망주였던 에드윈 잭슨이 14승11패로 호투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 선발 투수로 나서 호투했던 제임스 쉴즈, 맷 가자, 앤디 소낸스타인 등은 모두 연봉 1백만 달러 이하의 투수들인 점도 눈에 띈다.

 1998년 창단된 데블레이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5할 시즌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열 시즌 동안 최고 승수는 2004년에 기록한 70승(91패)이다. 명장으로 불리는 루 피넬라 감독을 영입한 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 팀은 여전히 4할 승률에 머물렀다. 지난 시즌에도 66승(96패)을 챙기는 데 그쳤던 탬파베이의 상승은 놀라운 일로 여겨지고 있다. [글: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56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구단은 1969년 창단했다. 창단 이후 파드레스는 1984, 1998년 두 번 내셔널리그 챔피언으로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두 번 모두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파드레스는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지 못했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ICCsports.com, Flickr, PicApp


San Diego Petco Park (2006)
San Diego Petco Park (2006) by iccsport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파드레스의 홈구장인 펫코파크

1969년 당시 신생팀은 파드레스,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시애틀 파일럿츠(현 밀워키 브루어스) 4개 팀이었다. 파드레스는 첫 6년 동안 매시즌 내셔널리그 서부조 최하위에 머물렀다. 희망이 없어보였던 파드레스에 회생의 빛이 비췄는데 바로 아지 스미스라는 걸출한 젊은 유격수가 파드레스 유니폼을 입게 된 일이다. 스미스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파드레스에서 뛰었고 유격수 수비의 교과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파드레드스는 이 밖에 데이브 윌필드, 롤리 핑거스와 같은 스타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승은 파드레스와 먼 거리에 있었다.

1984년은 파드레스 구단 창단 이래 최고의 해였다. 그해 이 팀은 9270패를 기록, 내셔널리그 서부조 챔피언이 됐다. 1984년은 토니 그윈이 생애 첫 타격왕에 오른 해였다. 그는 이후 7차례 타격왕이 됐다. 파드레스는 1984년 내셔널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동부조 챔피언인 시카고 컵스를 만났는데 결과는 파드레스의 승리였다.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팀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였다. 당시 타이거스는 104승을 기록한 강한 팀이었다. 스파키 앤더슨이 지휘했던 타이거스는 커크 깁슨의 극적인 홈런, 잭 모리스의 쾌투에 힘입어 41패로 시리즈를 마감했다. 파드레스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 도전은 실패였다.

이후 계속 서부조 우승에 실패했던 파드레스는 1996년 드디어 서부조 챔피언이 돼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구단 역사상 두 번째 포스트 시즌 출전이었다. 파드레스는 그러나 디비전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전패를 당해 일찌감치 탈락했다.

1998년은 파드레스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선에는 토니 그윈, 그렉 본, 켄 캐미니티, 월리 조이너, 스티브 핀리 등이 있었으며 마운드에는 케빈 브라운, 앤디 애시비, 트레버 오프먼 등이 상대 타선을 꼼짝 못하게 했다.

1998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파드레스는 그러나 뉴욕 양키스에 4전 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월드시리즈 이전까지 승승장구했지만 당시 뜨거운 팀이었던 양키스를 넘어서지 못했다.



파드레스는 이후 2005년과 2006년 내셔널리그 서부조 챔피언 자리에 올랐으나 역시 플레이오프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2007년부터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파드레스는 그동안 4명의 유니폼을 영구결번시켰다. 재키 로빈슨의 42번도 영구결번됐지만 그는 파드레스에서 뛴 선수는 아니었다. 첫 유색 인종이었다는 점에서 영예를 안겨준 것이다. 파드레스 소속으로 뛰면서 등번호가 영구결번된 선수는 스티브 가비(6), 토니 그윈(19), 데이브 윈필드(31), 랜디 존스(35) 4명뿐이다.

또한 파드레스 소속으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인물은 총 9명이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구단의 사장이었던 버지 바바시,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파드레스의 1루수였던 네이트 콜버트 등이 파드레스로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다음은 이 구단을 거쳐간 주요 인물에 대한 소개다.

◇ 존 무어스(현 구단주)

 1994년 파드레스 구단을 85백만 달러에 사들인 무어스는 구단주가 된 2년 후인 1996, 새 구장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2004년 펫코 파크가 개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자신이 운영했던 페러그린 시스템스의 18백만 주를 내다 팔아 무려 61140만달러를 현찰로 챙긴 바 있는 무어스는 포브스 잡지 선정 '미국 내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행정가 18'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 일로 여러 차례 고소를 당해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2002년에는 파드레스 구단 경영이 더욱 어려워졌고 이 팀은 몸값이 비싼 선수를 부지런히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했다.

그러나 법적 공방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무어스는 파드레스 구단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2005년 시즌 중 몸값 비싼 박찬호를 데려오는 등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박찬호는 한때 파드레스 팀 내에서 최고 연봉(15백만달러) 수령자였다. 무어스는 또한 UC 샌디에이고 암센터에 2천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자신의 부를 지역 사회에 환원했다. 한때 샌디에이고 시민들 사이에 '공공의 적'이었던 무어스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바뀐 이유다.

◇ 샌디 앨더슨( CEO)

 앨더슨은 90년대에 빌리 빈과 합작으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강팀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1998년부터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부사장으로 일하며 추락한 야구의 인기를 끌어올리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2005 4월 구단주인 무어스는 야구 경영권을 앨더슨에 넘겼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5. 그는 그동안 '재건'의 분위기였던 파드레스를 5년 내에 엘리트 구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앨더슨이 애슬레틱스의 단장과 사장으로서 올린 성적은 디비전 챔피언 4회였는데 무어스는 그와 비슷한 성적을 기대했다.

앨더슨은 애슬레틱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한두 선수에 거액을 쏟아부어 팬들을 경기장으로 오게하는 방식은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전에 샌디에이고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팀이 승리하면 팬들은 경기장을 찾게 되어 있다. 슈퍼스타가 승리를 가져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앨더슨은 그러나 케빈 타워 단장의 업무인 선수 영입과 드래프트 등에는 될 수 있으면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가이드라인이 그렇다(고연봉 선수 영입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앨더슨의 설명이었다. 앨더슨은 2009 3월 파드레스 구단을 떠났다. 현재 UC버클리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 케빈 타워스(전 파드레스 단장)

 존 무어스가 구단주가 되면서 데려온 구단의 운명을 바꿨던 2명은 바로 타워스 단장과 브루스 보치 감독이었다. 단장은 야구팀의 살림살이를 맡는데 타워스는 그동안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알차게 살림을 했다. 198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파드레스에 지명돼 이 팀의 마이너리그 팀에서 7년간 뛰었던 타워스는 여러 차례 팔수술을 받고 조기 은퇴해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1995년 파드레스의 단장이 되기 전까지 스카우트로서 이름을 날렸던 타워스는 선수 보는 눈이 탁월했다.

파드레스는 '타워스 시대'에 조 우승 2(월드시리즈 진출 1)를 기록했다. 1998년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던 파드레스는 그러나 우승 후 곧바로 스타 선수들을 내보내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는 타워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팀 연봉이 한때 38백만달러까지 내려갔으니 아무리 뛰어난 단장이라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7년까지 계약이 돼 있는 타워스는 "우리는 재정적인 지원이 확실히 있더라도 자유계약 시장에서 몸값 높은 선수를 데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돈을 쓰는 최악의 방법이다. 대신 스카우팅과 선수 개발을 통해 구단 수준을 끌어올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타워스는 지난 2009 10월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Bruce Bochy #15

◇ 브루스 보치(전 파드레스 감독)

선수 시절 백업 포수로 활동했던 것이 지도자로서 성공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말한 보치 감독은 선수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스타가 아니었고 남을 돕는 것이 인생의 좌우명이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친근감 있게 대한 점이 그를 '좋은 감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난 1996년 올해의 감독상을 받은 바 있는 보치는 리그에서 몇 되지 않은 '덕장'이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2007년부터 지금까지)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다.

San Diego Padres vs. Los Angeles Dodgers

◇트레버 호프먼(전 파드레스 마무리 전문)

설명이 필요 없는 최고의 클로저다. 생애 통산 591세이브를 기록한 호프먼은 1993년 플로리다 말린스에서 신인 투수로 2세이브를 올리고 당해 6월 파드레스로 트레이드된 바 있다. 이후 그는 샌디에이고에서 리그 최고의 클로저가 됐다. 그는 파드레스 선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오를 것으로 보이고 그의 등번호도 영구결번될 전망이다. 현재 밀워키 브루어스 선수로 등록돼 있다.

◇토니 그윈(전 파드레스 외야수)

90년대에 가장 정교한 타자로 이름을 날린 그윈은 3,141안타, 내셔널리그 타격왕 등극 8회등 화려한 기록을 남겼다. 생애통산 평균 타율 338리를 기록한 그윈은 84년과 98년에 파드레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도왔다.

◇버드 블랙(현 파드레스 감독)

메이저리그 좌완투수였던 블랙은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에인절스의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그는 코치 시절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2006 11월 브루스 보치가 떠난 빈자리를 맡게 됐다.



2009/12/28 - [연재/MLB 30개구단 역사] - [MLB 30개 구단 역사(1)] 보스턴 레드삭스
2009/12/30 - [연재/MLB 30개구단 역사] - [MLB 30개 구단 역사(2)] 콜로라도 로키스
2010/01/01 - [연재/MLB 30개구단 역사] - [MLB 30개 구단 역사(3)] 시카고 화이트삭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55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시카고에서 첫 경기를 가진 시기는 1900 42일이다. 당시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Stockings)라는 이름으로 일리노이대와 첫 경기를 가진 이 팀은 10-9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Chicago White Stockings Baseball Team, 1902
Chicago White Stockings Baseball Team, 1902 by Boston Public Library 저작자 표시
1902년 화이트스타킹스 선수들
 

20일 후 화이트 스타킹스라는 이름을 화이트 삭스로 개명한 이 팀은 4월 말부터 프로 야구 경기를 갖기 시작했고 첫 해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공식 우승은 아니었다. 아메리칸리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901년부터다. 아메리칸리그 구단주들은 1901 128일 시카고에 모여 리그를 메이저리그의 두 번째 리그로 공식 선언했는데 이것이 인정됐고 이후 내셔널리그는 1903년부터 아메리칸리그 챔피언과 월드시리즈를 갖기로 하는데 합의했다. 화이트삭스는 아메리칸리그의 태동과 월드시리즈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화이트삭스 역사

 

화이트삭스가 2005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기 전에 이 팀은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적이 없다고 오해하는 야구팬들이 많았다. 이 팀은 1906년 월드시리즈에서 동향의 라이벌 시카고 컵스에 42패로 승리했고 1917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뉴욕 자이언츠에 42패로 승리하고 챔피언이 된 적이 있다. 월드시리즈 2회 우승을 했던 팀이다.

 

화이트삭스는 그러나 1919년 ‘블랙 삭스 스캔들’이 발생한 이후 리그의 동네북이 됐다. 1921년부터 1959년까지 단 한 번도 1위에 오르지 못했던 것. 이 기간 화이트삭스의 아메리칸리그 순위는 6-8위였다. 1959년 앨 로페스 감독이 이끌었던 팀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한풀이를 했지만 LA 다저스에 패한 이듬해부터 추락했다. 화이트삭스는 이후 1983년이 되어서야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토니 라루사 감독이 이 팀을 24년 만에 포스트 시즌으로 인도했지만 화이트삭스의 성공 후 슬럼프는 다시 찾아왔다. 10년 동안 플레이오프 소식이 없었던 것. [관련 글: 블랙삭스 스캔들]

 

1993시즌 MVP였던 프랭크 토마스(아래 사진), 아지 기옌(유격수) 등을 중심으로 팀을 만든 화이트삭스는 바뀌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2005년까지 3차례 포스트 시즌을 경험했던 것이다. 화이트삭스의 인기 유격수였던 기옌이 2004년 감독 자리에 오르면서 막강해진 이 팀은 기옌 집권 2년 만에 리그 최고의 팀이 됐다. 그리고 2005년 마침내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됐다.

Cubs v White Sox

화이트삭스 구단주

 

농구팬이라면 제리 라인스도프(아래 사진 오른쪽)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인스도프는 그 유명한 시카고 불스의 구단주이다. 마이클 조던과 필 잭슨에게 매달 수표(check)를 줬던 그 사람이 바로 화이트삭스의 구단주다.

라인스도프는 스포츠계의 짠돌이로 잘 알려졌다. 불스가 NBA를 지배했던 당시 잭슨 감독의 연봉 대폭 인상 요구를 거절해 그를 떠나게 했는데 이는 조던 은퇴의 원인이었고 불스 구단은 와해했다. 라인스도프는 불스의 성공을 통해 엄청난 부를 챙겼지만 이를 선수에게 환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비난을 받았던 인물이다.

 

1980년 화이트삭스의 구단주가 된 라인스도프는 돈벌이에는 천재적인 감각을 가졌는지 구단주가 된 이후 코미스키 파크의 재건축(이후 U.S. 셀룰러 필드로 개명)과 유나이티드 센터(농구)의 건립을 이끌어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한 것은 라인스도프의 배경도 한몫 했다. 그는 변호사 겸 CPA였고 부동산 감정가이자 모기지 출자자였다. 1936년생인 라인스도프는 조지 워싱턴대 출신이다.   

 

 

ALDS game 4 - White Sox pregame Voodoo
ALDS game 4 - White Sox pregame Voodoo by guano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화이트삭스 스타

 

화이트삭스의 대표적인 스타는 역시 프랭크 토마스다. 토마스는 1993 MVP 투표에서 1위표 28개를 모두 받았고 이듬해에도 2위에 압도적으로 앞선 MVP 수상자가 됐다. 토마스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라이언 하워드와 같은 선수였다. 그는 타점 기계였고 타율도 높은 홈런 타자였다.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칼튼 피스크가 화이트삭스의 최고 스타였다. 70년대 보스턴 레드삭스 스타였던 피스크는 1981년부터 1993년까지 화이트삭스에서 뛰었는데 이곳에서 4차례 올스타로 선정됐고 명예의 전당에도 화이트삭스 선수로서 입성했다. 피스크는 마이크 피아자가 포수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가장 많은 롱볼(351)을 날린 안방마님이었다.

 

20세기 초반 화이트삭스의 스타는 ‘슈리스(Shoeless)’ 조 잭슨(아래 사진)이었다. 잭슨은 통산 타율 356리를 기록한 위대한 타자였지만 ‘블랙 삭스 스캔들’에 연루돼 일찌감치 야구를 접었고 은퇴한 후에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가 ‘슈리스’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1908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열린 한 야구 경기에 스파이크(신발)로 인한 물집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때 팀이 그의 출전을 간절히 원하자 양말만 신고 타석에 들어서 3루타를 친 이후부터다.


City of Chicago

 

시카고는 야구팬 분포로 보면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시카고 북부는 컵스팬이 대부분이고 남부에는 화이트삭스 팬이 많다. 북부 지역의 컵스팬들도 화이트삭스의 2005년 월드시리즈 진출과 우승에 관심을 보였다는 보도 내용도 있었지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의 마티 번스 기자는 시카고 현장 취재를 통해 “팬층은 여전히 극명이 나뉘어져 있다”고 보도했다. 불스나 시카고 베어스(NFL)가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을 때와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진출 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8인의 아웃(Eight Men Out)'이라는 영화에서 ’슈리스‘ 조 잭슨의 역할을 맡았던 존 쿠삭이 2005년 화이트삭스 구단에 티켓 문의를 했다가 퇴짜를 맞은 것은 바로 그가 2003년 “나는 컵스팬”이라고 공언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나뉨의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가 위치한 곳은 백인들의 거주비율이 높아 컵스는 백인들과 화이트칼라 계통의 사람들이 선호하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은 흑인들의 거주 비율이 높은 곳에 있어 흑인과 블루칼라 팬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미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화이트삭스 팬이다.

All-Stars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54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MLB 30개 구단 역사(2)] 콜로라도 로키스

연재/MLB 30개구단 역사 | 2009/12/30 20:25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콜로라도 로키스는 월드시리즈 1 진출에 불과한 신생(?)팀이다. 물론 오래전이라고 있는 1993년에 창단했지만 다른 구단과 비교할 여전히 신생 구단이라고 있다.  1993 메이저리그 시즌을 시작한 로키스를 - 해보았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ICCsports.com, PicApp


Coors Field, Denver, CO
Coors Field, Denver, CO by kla4067 저작자 표시

플레이오프 진출 3

 1993 메이저리그 신생 구단이 콜로라도 로키스는 창단 번째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많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95 당시 로키스에는 안드레스 갈라라가, 래리 워커, 비니 카스티야, 단테 비셰트 강타자가 즐비했는데 이들은 당해 각각 홈런 30 이상을 때려냈다. 그러나 이들의 홈런은 평가절하됐다. 고산지대에 있는 쿠어스 필드는 홈런을 많이 양산하는 곳이라 이들의 홈런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하튼 로키스는 와일드카드를 받아 플레이오프에 나갔고 디비전 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패했다.

그리고 12 만인 2007 로키스는 마침내 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고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시리즈 승리, 내셔널리그 챔피언 등극의 기쁨을 맛보았다. 월드시리즈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에 패해 우승의 감격을 누리지는 못했다. 로키스는 2009년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Andrés Galarraga (1997)
Andrés Galarraga (1997) by iccsport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내셔널리그 챔피언이 되기까지

 2007 내셔널리그 챔피언이 되기까지 로키스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995 플레이오프 진출 로키스는 번도 내셔널리그 서부조 2위에 오르지 못했던 팀이었다. 성적은 부진했지만 워커, 갈라라가, 엘리스 벅스, 카스티야가 이끌었던 로키스 타선은 폭발력이 있었다. 다만 투수들이 쿠어스 필드에서 자신감을 잃어 좋은 투수를 양성하지 못했던 것이 로키스의 단점이었다. 3위에서 5위자리를 맴돌았던 로키스는 2003년에는 창단 번째 감독인 클린트 허들을 영입했다. 허들은 이렇다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 동안 5 승률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오다우드 단장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허들은 월드시리즈 진출을 일궈냈지만 2009시즌 중에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해고됐다. 빈자리를 벤치 코치였던 트레이시가 채웠다.

Game Three NLDS-Colorado Rockies Host Philadelphia Phillies

 
헬튼 시대

 갈라라가가 1997 애틀랜타로 떠난 로키스는 마이너리그에서 애지중지했던 타드 헬튼을 승격시켰다. 그는 테네시대 출신으로 로키스가 1995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지명했던 1루수였다. 헬튼은 메이저리그 데뷔 5차례 올스타로 선정됐고 2001년에는 AP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그는 통산 타율 328리에 홈런 325, 2134안타를 기록했는데  로키스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있다. 헬튼은 1997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줄곧 팀에서만 뛰었다.


로키스의 강점: 결속력

 로키스가 최근 동안 상승세를 이유 하나는 바로 결속력이다. 결속력이 가능한 이유 하나는 주축 선수들 대부분이 로키스에 지명돼 구단 마이너리그에서부터 한솥밥을 먹었던 . 팀의 얼굴인 타드 헬튼을 비롯해 중심 타자인 트로이 툴로위츠키, 브래드 호프는 오직 로키스와 인연을 맺은 선수들이다. 에이스 투수인 제프 프랜시스와 선발 투수인 애런 쿡도 로키스가 드래프트에서 픽업한 선수들이다. 결속력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오다우드 단장

 오다우드 로키스 단장은 1999 로키스의 단장이 되기 전까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단에서 단장 수업을 받은 있다. 그는 인디언스 단장인 하트의 제자라고 있다. 1999 로키스 단장이 오다우드는 차례 실수를 했다. 로키스의 성적이 좋지 않은 원인을 투수력이라고 판단했던 그는 대럴 카일, 브렛 세이버헤이건, 마이크 햄튼, 데니 네이글 등에 거액을 쏟아부으며 투수력 보강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오다우드는 '' 눈을 돌렸다. 마이너리그가 살아야 로키스가 산다는 것을 절감한 오다우드는 건실한 팜을 세우는 열정을 쏟았다. 결국 돈으로만 팀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단장이 깨달은 것이 로키스 구단이 성공한 주된 이유라고 있다.

Larry Walker
Larry Walker by iccsport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영구 결번 없음

 구단을 창단한 14년이 됐기 때문에 영구 결번된 등번호는 아직까지는 없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도 없다. 래리 워커가 로키스 선수로서는 번째 명예의 전당행 선수가 것으로 보인다. 워커는 1995년부터 2004년까지 로키스에서 뛰었고 1997년에 내셔널리그 MVP, 1997, 98, 99, 2001, 2002년에 골드글러브상, 올스타 4 선정의 영예를 누린 있다. 전문가들은 워커와 타드 헬튼은 나란히 명예의 전당 행사와 등번호 영구 결번 행사에 참여할 로키스 선수가 것으로 예상했다.

 

위키피디아 자료
Founded
(창단):
1991년

Began play (데뷔 시즌): 1993 (National League expansion)

Uniform colors (유니폼 색깔): Black, Purple, Silver, and White

Logo design (로고 디자인): Purple mountain with baseball

Team mascot (마스코트): Dinger, a purple anthropomorphized triceratops

Playoff appearances (플레이오프 진출) (3): 1995, 2007, 2009

Owners (구단소유): Linda G. Alvarado, Pete Coors, Lee Larson, Marne Obernauer Sr., Marne Obernauer Jr., Denver Newspaper Agency, Coors Brewing Co., Clear Channel Communications, and Beverage Distributors Corp., Dick and Charlie Monfort [35]

Chairman & CEO (회장): Charles Monfort

Vice Chairman(부회장): Richard Monfort

President (사장): Keli McGregor

General Manager (단장): Dan O'Dowd

Special Assistant to the GM (단장 보좌역): Vinny Castilla

Local Television(지역 방송): FSN Rocky Mountain

Spring Training Facility (스프링캠프 경기장): Hi Corbett Field, Tucson, AZ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5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MLB 30개 구단 역사(1)] 보스턴 레드삭스

연재/MLB 30개구단 역사 | 2009/12/28 13:02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A
A "Model" Fenway Day by B Tal 저작자 표시비영리

보스턴 레드삭스는 1918년 월드시리즈에서 챔피언이 된 후 단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갖지 못했다. 이 팀이 2004년에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이 끊임없이 따라다녔을 정도다. 레드삭스의 역사를 줌인해 본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Flickr, PicAPP

보스턴 아메리칸스

 레드삭스는 1900년 보스턴 아메리칸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그리고 이후 서머셋, 필그림이라는 닉네임을 가졌다. 창단 후 3년 만인 1903년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챔피언이 됐다. 1919년까지 보스턴은 5차례 챔피언이 되는 등 황금기를 누렸다. 보스턴은 1907 1218일 레드삭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는 레드 스타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보스턴은 이후 기자들이 계속 '레드 삭스'로 바꿔 기사를 송고하면서 레드 삭스가 됐다. 당시에는 선수들이 신는 양말 색깔로 팀 이름을 정하는 게 유행이었다.

Fenway Park Tour, Opening Day (-Eve) 2009: Hall of Fame plaque for Babe Ruth, 1914-1919
Fenway Park Tour, Opening Day (-Eve) 2009: Hall of Fame plaque for Babe Ruth, 1914-1919 by Chris Dever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베이브 루스를 보낸 후

레드삭스 황금기의 일부인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베이브 루스는 이 팀의 3할 타자로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는 전성기에 들어가기 직전의 선수였다. 이때 레드삭스의 구단주인 해리 프레이지는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보냈다. 1920 12일의 일이다. 프레이지는 브로드웨이 연극 개최 자금 마련을 위해 현금과 루스를 맞교환했다. 루스는 트레이드된 첫해에 홈런 54개를 때려냈고 이듬해에 59개를 기록해 미전국 야구팬을 흥분케 했다.

Babe Ruth
Babe Ruth by ceetard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밤비노의 저주

베이브 루스의 별명은 밤비노였다. 밤비노의 저주라는 표현은 보스턴 글로브지의 댄 셔니시 기자가 1990년 기사에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이에 앞서 1986년 월드시리즈에서 레드삭스가 다 이긴 경기를 야수의 결정적인 실수로 놓치자 뉴욕 타임스의 조지 베시 기자가 "베이브 루스의 저주가 다시 그들을 쳤다"라는 내용을 써 레드삭스의 '트레이드 실수'를 조롱했다. 당시 레드삭스는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 가뭄에 시달렸던 반면 양키스는 루스를 받아들인 이후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단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2004년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후 '밤비노의 저주'는 거론되지 않았다.

ted williams
ted williams by jpangan3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테드 삭스

레드삭스는 루스를 보낸 후 결정적인 영입에 성공했다. 1939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소속이었던 테드 윌리엄스를 영입했던 것. 윌리엄스는 이후 1960년까지 레드삭스에서 뛰고 은퇴했다. 그는 야구 역사상 몇 안 되는 단타, 장타 모두를 잘 때려내는 왼손 타자였다. 그는 1952년과 53년에 연속으로 4할 타율을 기록해 마지막 4할 타자가 됐다. 19시즌을 뛰면서(3년 동안은 입대해 세계 2차 대전에 참전) 그는 홈런 521, 2654안타, 타율 344리를 기록했다. 그의 평균 OPS(출루율+장타율)는 무려 1.015이었다. 윌리엄스의 맹활약에도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에 단 한 번 진출했는데 이 팀은 1946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34패로 아깝게 졌다. 당시 기자들은 레드삭스를 테드(Ted) 삭스로 불렀다.

Yaz Yastrzemski

60-80년대="예스" 시대

테드 삭스 시대가 끝나고 레드삭스는 "예스" 시대를 맞았다. 칼 예스트렘스키yastrzemski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 그는 1961년 메이저리그 데뷔를 해 1983년까지 '빨간 양말'을 신고 뛰면서 3,419안타, 홈런 452개를 기록했고 무려 18차례나 올스타로 선정됐다. 레드삭스는 그러나 60년대에 한 차례 70년대에 한 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신시내티 레즈와 카디널스에 34패로 애석한 패배를 당했다. 레드삭스는 80년대 후반 조 모건을 감독으로 기용해 잠시 반짝했지만 이 후 성적의 널뛰기가 이어졌다.

Boston Red Sox Name New Manager

90년대

 90년대는 댄 듀켓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듀켓은 레드삭스의 단장이었다. 듀켓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팜 시스템을 재건해야 한다'고 선언했고 이후 마이너리그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으로 노마 가르시아파라, 칼 파바노, 데이비드 엑스타인 등이 메이저리거로 성장했지만 로저 클레멘스, 모 본이 자유계약 시장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은 단장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듀켓 단장이 클레멘스에 대해 "야구 인생의 황혼기에 있다"는 말을 한 것은 큰 실수였다. 듀켓은 레드삭스가 3차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도록 이끌었지만 이 팀은 세 번 모두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듀켓이 몰두했던 것은 '극동 지역 스카우팅'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조진호, 김선우, 송승준, 안병학, 채태인, 이상훈 등이 레드삭스와 계약을 맺고 태평양을 건너왔다. 그러나 결과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Red Sox World Series Victory Parade Held In Boston

새 시대

존 헨리가 레드삭스 구단을 2002년에 사들인 후 대변혁이 일었다. 헨리는 2002 228일자로 듀켓 단장을 해고했고 그해 말 예일대 출신의 28세의 젊은 단장인 티오 엡스틴에 레드삭스 살림살이를 맡겼다. 헨리는 오클랜드의 빌리 빈에게 단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곧바로 엡스틴을 단장으로 임명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좋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연소 단장이 된 엡스틴은 전통적인 경영방법과 세이버메트릭스를 잘 버무려서 레드삭스를 튼튼한 구단으로 만들었고 이 팀은 2004년 마침내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됐다.

레드삭스는 그러나 '양키스 스타일'로 필요한 선수를 돈으로만 영입하는 데 익숙해져가는 것 아니냐는 비난의 소리를 들었다. 레드삭스는 일본의 괴물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영입하고자 무려 5110만 달러를 들여 계약 교섭권을 획득해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마쓰자카는 신인 시즌에 1512, 9이닝 평균 자책점 4.40, 탈삼진 201개를 기록했다.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 결승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를 만나 4전전승으로 승리를 거두고 4년 만에 2번째 챔피언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레드삭스는 2008년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존 레스터의 쾌투에 힘입은 레드삭스는 에인절스에 31패로 승리하고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는데 결승에서탬파베이에  13패로 뒤지다가 33패로 타이을 이뤘지만 최종 7차전에서 3-1로 패해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레드삭스는 2009시즌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뤘지만 1라운드에서 에인절스에 3전 전패를 당하고 탈락했다.

Miami Dolphins v New England Patriots

Summary

레드삭스는 1908년부터 2009년까지 월드시리즈 우승 6, 페넌트 레이스 우승 10, 플레이오프진출 19회의 기록을 남겼다. 2000년대의 레드삭스는 1910년대 이후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레드삭스는 2000년대에 6번이나 플레이오프에 나갔고 월드시리즈 챔피언 2회 등극의 기록을 세웠다. 레드삭스는 1910년대에 4차례나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바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4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