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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칼럼] 에인절스의 배고픈 사자들

BK Column/추억의 칼럼 | 2010/01/21 21:19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2002년 10월20일자 밝은터의 칼럼입니다. 2002년 에인절스는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됐습니다.

2002 World Series, Angels the Champion
2002 World Series, Angels the Champion by iccsport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배고픈 사자들(Hungry Lions)’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 구원투수진에 붙여주고 싶은 별명이다. 이들의 이력서를 들춰본 사람이라면 ‘배고픈 사자들’이라는 닉네임을 부여하는데 동의할 것이다.

먼저, 2002 포스트 시즌이 낳은 신세대 스타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는 16세 때 에인절스 구단의 엄청난 관심 속에 계약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부상과 부진으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싱글A에서조차 형편없는 성적을 낸 그는 빅리그 진출에의 희망 조차 가질 수 없었던 선수였다.

마이크 소시아 감독의 총애를 받고 있는 브렌든 다널리는 마이너리그와 인디펜던트 리그를 전전했던 그야말로 무명선수다. 그의 이력서에 방출(release)이라는 단어는 무려 8번이나 나온다.

벤 웨버는 어떤가. 그는 1991년부터 96년까지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꿈을 접고 척추신경의가 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던 인물이다.

그는 곧바로 대만 프로야구의 러브콜을 받고 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채 97년부터 98년까지 타이페이 팀에서 활동했다. 웨버는 오프 시즌 중에는 4달러50센트를 받고 공장에서 조립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특급 마무리 전문 투수로 알려진 트로이 퍼시벌도 한때 야구를 중단하려고 했던 선수다. 그는 1990년 프로에 데뷔한 후 마이너리그 싱글A 보이지(Boise) 팀에서 포수로 뛰며 타율 2할을 기록했던 ‘평범 이하’의 선수였다. 퍼시벌은 1991년 투수로 전향했고 의외의 활약을 펼치며 1995년 에인절스에 합류했다.

‘배고픈 사자’들이 에인절스의 불펜의 핵이 된 사연도 독특하다.

로드리게스는 지난 9월 선수 확장(25명→40명)때 구단에서 경험을 실어주기 위한 배려를 해 빅리그 승격을 이뤘는데 겁 없는 투구로 상대타자들을 줄줄이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을 인정 받아 플레이오프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로드리게스는 메이저리그 데뷔 후 첫 2승을 포스트 시즌에서 기록한 첫 투수다. 그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까지 4승을 올렸다.

2000년 겨울에 살충제 관련 회사에서 일하며 어렵게 생활을 했던 다널리는 같은해 터론토 블루제이스와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해 다시 방출 됐지만 2001년 에인절스에서 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 받았다.

30세를 눈앞에 뒀던 다널리는 더블A와 트리플A에서 9승2패, 13세이브를 기록하며 당해 10월10일 에인절스의 40인 명단에 들어가는 감격을 누렸다.

대만에서 2년동안 19승10패, 2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한 후 고국으로 돌아온 웨버는 1999년과 2000년 시즌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트리플A팀인 프레즈노에서 뛰었고 그곳에서 현 에인절스 코치인 란 레나키를 만났다. 이후 레나키가 에인절스의 3루수 코치로 부임하면서 웨버의 영입을 추천했고 이는 웨버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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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미국 스포츠

BK Column/추억의 칼럼 | 2010/01/15 21:57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Nashua Dodgers 1946 Mural
Nashua Dodgers 1946 Mural by StarrGazr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글: 밝은터 (ICCsports.com의 블로거)

매년 1월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기념하는 날이 있다. 킹 주니어 목사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부조화에 대해 경종을 울렸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흑인인 그는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일에 백인 목사들과 함께하려 했고 미국인들에게 화해(reconcilia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킹 목사는 미국 사회가 화합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흑인이나 소수계 민족들이 백인을 상대로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해를 통해 나누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존경받는 지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과거 한 방송에 출연, "만약 당신이 손 한 번 흔들어 이 세상의 문제 딱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인종적 분리와 갈등입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킹 목사, 그레이엄 목사와 같은 이들의 노력으로 미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인종문제와 갈등을 많이 해결한 게 사실이다. 멜팅팟, 샐러드 보울과 같은 말이 나오는 것도 어쨌든 간에 여러 인종이 어울려서 살기 때문이었다. 스포츠계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흑인들이 주요 스포츠계에 진출할 수 없었는데 요즘은 유색인종이 메이저 스포츠의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 인종의 벽은 이들의 활동 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야구는 '니그로 리그'라고 해서 흑인들만의 리그가 있었는데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진출 후(1947년) 인종의 벽이 깨졌고 농구도 1950-51시즌에 나다니엘 클리프턴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NBA 드래프트에서 지명돼 첫 번째 흑인 NBA 선수가 됐다. 단 박스데일은 1953년 처음으로 NBA 올스타전에 출전한 흑인으로 기록됐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입문한 바로 다음해에는 제임스 배스킷이라는 배우가 남자 흑인 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주도했던 인권운동 이후 미국은 유색인종의 주류 사회 진출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흑인이 리더가 될 수 없다는 이전 분위기를 깬 사건은 프랭크 로빈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흑인 감독이 된 일이다. 1975년은 흑인의 주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된 해였다고 볼 수 있다. 당해 흑인 사성 장군(대니얼 제임스 주니어)이 탄생했고 같은 해 흑인과 백인 커플의 삶을 조명한 TV 시리즈가 등장해(더 제퍼슨스) 미국인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1975년 수퍼 보울에서는 역사상 첫 흑인 MVP(프랑코 해리스)가 탄생했고 애덤 웨이드라는 연예인은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게임 쇼'(CBS) 진행을 맡았다. 

 80년대와 90년대에 흑인의 주류 사회 진출은 봇물이 터졌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버락 오바마(민주당)가 흑인 대선 후보로서 사상 처음으로 코커스(아이오와)에서 승리를 하는 기념비적인 일이 발생했고 그는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7년 수퍼 보울에서는 흑인 감독(토니 던지, 러비 스미스)이 지휘하는 두 팀(인디애나폴리스 콜츠, 시카고 베어스)이 맞붙는 귀한 일이 있었다. 2008년 수퍼 보울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심판인 마이크 캐리가 레프리로 나선다. 
 
이 밖에 스포츠계에는 아시아계 선수들이 속속 진출해 진정한 샐러드 보울이 됐는데 여전히 차별은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유색인종 차별이 가장 심한 스포츠는 야구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백인에게 더 기회를 주는 분야다.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의 수가 줄어든 이유다. 한편으로는 백인에 대한 차별도 있다. 농구나 풋볼에서 백인은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는 기회를 얻기 쉽지 않다. 

 그래도 미국 사회는 인종 차별을 근절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감독을 고용할 때 유색인종과의 인터뷰를 의무화하는 제도는 뛰어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아도 아직은 비전이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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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지코리아 2010/01/16 0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정보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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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 올림픽 미주 예선이 끝난 후에 밝은터가 쓴 칼럼입니다. 사진=PicApp

원조 드림팀 vs. 리딤 팀

Jordan Gold medal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농구 미주 예선인 2007년 FIBA 아메리카가 열리기 전 나는 2007년 판 미국 대표팀이 '원조 드림팀' 이후 가장 흥미로운 팀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실제 이 대회에서 미국은 10전 전승을 거뒀고 10경기에서 평균 40점차로 승리를 해 '원조 드림팀'에 가장 근접한 팀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베이징 올림픽 미국 남자 농구팀의 장점은 '탤런트'뿐만 아니라 팀 융합과 열정 3가지에서 발견됐다. 1992년 원조 드림팀 선발 위원회의 위원이었고 뉴저지 네츠의 단장인 로드 손은 "운동능력으로 따지자면 이 팀(베이징 올림픽팀)을 능가할 대표팀이 없었다"고 ESPN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세르히오 에르난데스 감독은 "원조 드림팀을 아무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베이징 올림픽 드림팀을 좋아한다. 그들은 융화가 잘 됐고 수비를 열심히 했다. 또한 점수 차가 많이 벌어져도 끝까지 열심히 싸웠다"고 칭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원조 드림팀과 대결을 경험했던 '전설' 호세 오르티스는 "개인적으로 원조 드림팀보다 베이징 올림픽 미국 대표팀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원조 드림팀에는 은퇴한 선수도 있었고 선수로서 황혼기에 있던 선수가 많았는데 이 팀은 젊고 능력 있는 선수로 구성됐다"고 덧붙였다.

 팬들은 그러나 '원조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다. ESPN닷컴의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원조 드림팀과 베이징 올림픽 미국 대표팀이 맞붙는다면 원조 드림팀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이 훨씬( 69.1%) 많았다. 

 LA 타임스의 베테랑 칼럼니스트인 마크 하이즐러는 "원조 드림팀이 크게 달랐던 것은 역시 매직 존슨의 존재였다. 그는 선수들의 능력을 한 단계 높이는 성품과 실력을 겸비한 선수였다"고 평가하면서 "현재의 대표팀도 인상적인 것이 팀워크다. 특히 열심히 뛰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Barcelona Olympics


 많은 농구 칼럼니스트는 팀 USA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이 유력하다고 예상했다. 또한 베이징에서의 결과에 따라 원조 드림팀과의 비교는 더 화제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베이징 올림픽팀은 흠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옥에 티를 찾는다면 마이크 밀러와 타이슨 챈들러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들 수 있다. 밀러의 외곽슛은 기대에 못 미쳤고 챈들러도 골밑 공략이 위력적이지 못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농구 칼럼니스트인 크리스 매닉스는 "두 선수는 내년 올림픽에 드웨인 웨이드와 크리스 보쉬로 교체될 것"으로 예상했다. 웨이드와 보쉬는 부상으로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으나 벤치를 지키며 응원했다. 포워드 카멜로 앤서니는 "웨이드와 보쉬는 우리와 손발을 잘 맞출 것이다. 그들이 합류하면 개인적으로 이 팀이 마음에 쏙 든다"고 말했다. 베이징 올림픽 출전 선수 12명은 내년 6월28일 결정 난다. 

 미국 농구 대표팀의 감독인 마이크 슈셉스키는 "이번 대회에서 얻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선수들 간에 생긴 우정과 신뢰다. 이는 성공하는 집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팀이 2004년 올림픽과 2006년 세계 남자 농구 선수권과 비교해 비슷한 팀이라고 봤다. 그러나 다른 것 하나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존재와 그의 팀플레이였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브라이언트는 이번 대회에서 팀 동료가 돋보이도록 경기를 풀어갔다. '코비는 이기적'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쏟아냈던 하이즐러 LA 타임스 칼럼니스트도 브라이언트를 극찬했다. 

 1992년 원조 드림팀이 매직 존슨으로 인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팀이 됐던 것처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미국 대표팀에서는 브라이언트가 그러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부상과 특별한 사건, 사고가 없다는 가정하에 내가 예상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미국 대표팀의 12인 출전 선수는 다음과 같다: 코비 브라이언트(LA 레이커스),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 카멜로 앤서니(덴버), 제이슨 키드(뉴저지), 마이클 레드(밀워키), 드와이트 하워드(올랜도), 드웨인 웨이드(마이애미), 크리스 보쉬(토론토), 아마리 스타더마이어(피닉스), 천시 빌럽스, 테이션 프린스(디트로이트), 데론 윌리엄스(유타). 

[원조 드림팀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 결과]
USA 116 Angola 48
USA 103 Croatia 70
USA 111 Germany 68
USA 127 Brazil 83
USA 122 Spain 81
USA 115 Puerto Rico 77
USA 127 Lithuania 76
USA 117 Croatia 85

 
2008년 리딤팀은 드림팀에 근접?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직전에 밝은터가 쓴 칼럼입니다.

Sports News - February 16, 2009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올림픽에는 여러 관심거리가 있지만, 미국인들의 최대 관심은 역시 남자농구팀에 있다.

NBA 올스타로 구성된 올림픽 남자 농구대표팀이 과연 자존심을 회복하고 다시 ‘꿈의 팀’이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리기 전, 전 세계가 술렁거렸다. 이유는 사상 처음으로 NBA 올스타가 올림픽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올림픽팀에는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클라이드 드렉슬러, 패트릭 유잉, 스카티 피펜, 칼 말론, 찰스 바클리, 데이비드 로빈슨, 존 스탁턴 등 수퍼스타들이 속해 전 세계 농구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바 있다.

‘드림팀’이라는 표현이 인기를 끌었고 이 드림팀과 대결하는 상대팀은 경기 결과보다는 경기 후 기념촬영에 더 관심을 쏟았다. 원조 드림팀은 30~68점차로 상대를 가볍게 누르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USA V Argentina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드림팀은 그야말로 꿈의 팀이었다. 로빈슨, 바클리, 피펜, 레지 밀러, 샤킬 오닐, 말론, 앤퍼니 하더웨이, 하킴 올라주원, 스탁턴으로 구성된 1996년 드림팀도 큰 점수차로 상대를 누르고 8전 전승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드림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민망한 때는 바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였다. 세계 농구의 수준이 크게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NBA 선수들이 올림픽 출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

케빈 가넷, 빈스 카터 등 뜨는 스타들이 참가하긴 했지만, 최정예 팀이 아니었던 관계로 미국은 진땀승을 거둘 때가 자주 있었다. 미국은 리투아니아에 가까스로 85-76으로 승리, 서서히 꿈의 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상대팀들은 드림팀을 이기는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4강전에서 리투아니아를 다시 만난 미국은 85-83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리투아니아의 마지막 3점슛이 들어갔더라면 드림팀 구성 후 첫 패배를 당할 수 있었다. 결승에서 프랑스를 85-75로 눌렀던 미국은 금메달을 따냈지만, 미국은 더는 드림팀이 아니었다.

2002년 세계 남자 농구 선수권은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열려 모든 사람들이 미국의 우승을 당연시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NBA 올스타로 구성됐던 미국은 6위에 그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Mens Qtrfinal Spain v USA

NBA 스타들은 여전히 올림픽 출전을 거절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선발된 12명의 선수 중 10명이 올림픽 출전을 거부했던 것. 미국은 카멜로 앤서니, 르브론 제임스, 팀 던컨, 앨런 아이버슨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했다.

미국은 예선 라운드에서 푸에르토리코에 73-92의 충격의 패배를 당했고 리투아니아에도 져 4강 진출도 어려운 상황이 된 바 있다. 턱걸이로 4강에 나선 미국은 4강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에 81-89로 무릎을 꿇었다. 미국이 올림픽에서 한 대회에 3패를 당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후 미국은 전 피닉스 선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구단주였던 제리 콜란젤로를 중심으로 올림픽 선발위원회를 만들어 자존심 회복에 나섰다.

2006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3위에 그쳤지만, 회복의 분위기가 보였고 콜란젤로의 노력으로 NBA 수퍼스타들이 올림픽 출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3년 전에 구성된 팀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위한 ‘리딤(회복)팀’이다.

미 농구 팬들은 ‘리딤 팀’이 농구라는 스포츠가 탄생한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길 기대하고 있다. 분위기는 좋은 편이다. 3년 전부터 손발을 맞춘 ‘리딤 팀’은 팀워크가 좋은 편이다. 또한, 국제 규정에도 익숙하고 상대팀에 대한 자세도 겸손하다. 국제 대회에서 잦은 패배를 경험하면서 얻은 교훈이 그들을 성숙하게 했다.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서니, 드와이트 하워드 등 현재 NBA에서 베스트5 안에 들 선수가 모두 이번 올림픽에 참가했다. 여기에 명장 마이크 슈셉스키가 지휘봉을 잡아 더욱 안정감이 있다.

BASKETBALL GOMELSKI USSR OLYMPICS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당시 소련이 챔피언이 됐다.

1972년과 보이코트로 출전하지 않았던 1980년, 1988년 올림픽을 빼면 2000년까지 대회마다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미국 남자 농구팀이 다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까. 나의 예상은 매우 긍정적이다.

올림픽에서 남자 농구가 정식 종목이 된 해는 1936년이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농구의 종주국인 미국은 5전 전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땄다. 미국은 이후 6개 대회에서 금메달을 독식했다.

미국은 1940년 1944년 세계 전쟁으로 올림픽이 중단됐던 해를 제외하면 1968년까지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심판의 어이 없는 판정으로 금메달을 소련에 빼앗겼던 미국은 1976년부터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참가한 대회에서(서울 올림픽을 빼면) 모두 승리를 거두고 금메달을 땄다.

미국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간신히 동메달을 딴 것은 미국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NBA 선수들에게 애국하라는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했고 NBA 선수들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세계 농구의 수준이 크게 높아져 NBA 올스타가 모두 출전해도 미국이 금메달을 장담할 수는 없다. 이는 NBA의 국제화와도 연관이 있다.

NBA의 국제화로 유럽이나 중남미 선수들이 미국 농구를 가까이서 접하게 됐고 그들은 미국 농구 선수들이 더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정신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2009년에 쓰는 후기

미국은 중국, 앙골라, 스페인, 독일을 평균 32.2점차로 누르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 B조를 지배했고 2라운드에서 호주에 116-85로 승리했으며 4강전에서는 아르헨티나를 101-81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 미국은 스페인에 118-107로 승리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UPI POY 2008 - The Beijing Olymp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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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칼럼] 제1회 WBC와 제2회 WBC

BK Column/추억의 칼럼 | 2010/01/09 20:15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제2회가 끝난 후의 상황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제1회 때 제가 쓴 글과 제2회의 글을 종합해본 내용입니다. 

글/사진: 밝은터 (ICCsports.com 블로거) 

Chan Ho Park, the Closer, during 2006 WBC
Chan Ho Park, the Closer, during 2006 WBC by iccsport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회 WBC 당시


미 언론의 관심도 
 제1회와 2회는 연속으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2006년과 2009년에 열린 두 대회는 미 주류 언론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ESPN을 통해 미 전국으로 중계돼 야구팬들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불미스러운 심판 판정도 있었고 엉터리 대진표 작성으로 피해가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첫 대회였다. 

 미 언론의 관심은 자국 리그에 있었다. 특히 NCAA 토너먼트(대학농구)가 열리는 바람에 WBC는 언론 기사에서 찬밥이었다. WBC는 미 언론 입장에서는 돈이 안 되는 대회다. 축구 월드컵도 그렇다. 한국도 그런 면이 있지만 미국은 돈이 되야 언론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스포츠 분야는 그게 철저하다. 제3회 대회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미주 한인 사회 관심 집중 
 미국 한인 이민자들은 2002년 월드컵 축구, 2006년 월드컵 축구, 그리고 2006년 WBC에 이어 2009년 행사를 즐겼다. 2006년 당시 한국이 8강전에서 일본을 눌렀을 때 미주 한인 사회에서 WBC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였다. 2009년 대회에도 비슷했다. 

 대회가 무르익어 가자 온통 WBC 이야기였다. WBC 1라운드 때까지만 해도 대회가 열린 줄도 몰랐다는 지인은 “WBC가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가족과 함께 여러 명이 함께 보니 더욱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2006년에는 한국은 짜증나는 정치 이야기로 국민이 힘들었고 미주 동포들도 힘들어했다. 2009년에는 경제의 어려움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2006년과 2009년 WBC가 잠시나마 머리를 식히고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도록 하는데 도움이 됐다. 

 2006년에 미주 동포들의 단결된 모습은 미 주류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2009년 대회에서는 한국 팬 없이는 대회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여론이 일 정도였다. 미국 팬들은 한국인의 에너지 넘치는 응원에 감동했다. 2006년 일본과의 4강전은 우중 경기로 펼쳐졌지만 한인 팬들의 응원 열기는 식지 않았는데 이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9년 무려 5차례나 일본과의 대결에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1만 명에서 3만 명의 한인들이 경기장을 찾았는데 이에 대회 관계자들이나 미국 팬들은 놀라워했다. 


야구에 대한 관심 높아져 
 2006년 당시 일본과의 4강전이 열리는 중에 나는 여러 차례 전화를 받았다. 지인들은 갖가지 질문을 쏟아냈다. "야구가 9회까지 하는 것이 맞느냐?" "서재응은 왜 뺀 거냐?" "김병현은 왜 그렇게 오래 마운드에 있게 했냐?"는 등의 질문을 받은 것. 

 평소 야구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궁금한 게 많았던 것이다. 야구가 몇 회까지 하는 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경기를 봤을 정도이니 그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인이라면 대부분 야구 경기를 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2009년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필자의 자녀와 조카가 야구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2006년 당시만 해도 너무 어려서 야구를 즐기기 어려웠지만 이제 초등학생이 되고 나니 야구가 뭔지를 알고 WBC를 보니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대회 중에 조카 진우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과의 결승전을 봤냐”고 물었더니 “이치로의 안타로 아깝게 졌다”고 말했다. 

 나의 자녀와 조카 진우는 모두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영어가 더 편하다. 이들은 영원한 한국 야구 팬이 된 것이다. 경기장을 찾아갔을 때도 젊은이들은 대부분 영어가 편한 사람들이었다. 이것보다 더 좋은 한국 문화 교육, 한국 정체성 교육은 없는 것 같다. 

미주 한인들에게 자부심
 2006년 WBC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미주 한인들은 항상 "한국 야구는 더블A 수준"이라는 말을 들었다. 기를 펼 수 없었다. 그 말에 세뇌되어 우리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익숙해 있었다. 2006년 당시 '미국전을 제치고(그냥 지고) 일본전에 전력을 다 쏟는다'는 기사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당시 한국이 놀라운 승리 행진을 하자 최소한 국가 대표의 수준은 메이저리그 급이라는 생각을 팬들이 갖게 됐다. 주류 언론 기자들도 '원더풀 코리아'를 외쳤다. 이는 또한 한인 1.5세, 2세들이 어깨를 으쓱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이러한 자부심과 반응이 업그레이드됐다. 미 언론에서는 “이렇게 잘하는 한국 선수들이 왜 메이저리그에서 안 뛰냐”는 뒤늦은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스카우트들은 “우리가 한국 야구를 잘못 본 것 같다”고 회개(?)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으로 남게 된다. 


더 많은 한국 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 기대
 팬들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2006년 당시 팬들은 그럴 일이 자주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승엽, 박진만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2006년 당시 ESPN의 분석가로 활약한 에릭 캐로스는 박진만에 대해 "이 대회에 참가한 유격수 중 가장 수비가 좋다"고 했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의 미국 진출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여전히 한국 야구는 저평가 됐고 한국 선수가 미국에 진출하기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자유계약 선수 제도나 군 문제 등이 한국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막았다. 그러한 문제는 2009년에도 남아 있다. 메이저리그의 관심은 높아지겠지만 근본적으로 한국 프로야구 시스템과 사회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것은 쉬워보이지 않는다. 추신수 등 한국 선수 4명과 관련된 병역 특례에 대한 여론이 모아지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한국 야구 발전의 계기 
 2006년 WBC에서의 성공은 한국 프로야구가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2009년 WBC의 성공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야구장으로 몰려드는 팬들의 수가 늘어날 것 같다. 2006년 4강전이 열리던 날 서울 잠실 야구장은 '합심 응원'을 하는 팬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2009년 결승전이 열리던 날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2006년에 김인식 감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됐다. 2009년에는 그런 명성을 ‘굳히기’ 했다. 

 2006년에 한국도 한미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열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됐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메이저리그 스타들과 한국 프로야구 스타들의 대결은 상상만 해도 멋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2009년에는 그럴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돔구장 건립이 필요하다. 다목적 돔구장을 세워 야구와 축구를 할 수 있고 팬들이 많이 오는 중요한 농구 대회(예를 들어 NBA 올스타 초청 등)를 개최한다면 돔구장은 스포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줄 것 같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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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2009 - WBC Semifinal - Korea Beat Venezuela 10-2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경기를 지켜본 미국 기자들은 ‘저런 선수들이 왜 메이저리그에 없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제1회 대회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 저렇게 뛰어난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을까.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한국 선수들은 영입하기가 쉽지 않은 3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한국 선수들은 병역 의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의무가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 단장들은 그러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미국으로 데려와 잘 성장시킨 선수가 군 복무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한다는 부담이 구단들이 한국 선수 영입을 꺼리게 한다.

두 번째는 어떤 선수가 자유계약으로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길어 프라임타임이 지난 선수를 영입해야 하기 때문에 흥미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세 번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던 선수가 미국에서 성공했던 과거 기록이 없다는 것도 여전히 한국 선수의 미국 진출에 발목을 잡았다. 이상훈, 구대성 등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들은 미국에서 모두 실패를 맛보았다. 전성기가 지났고 문화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한국 선수 영입은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라이언 킹’ 이승엽을 영입했을 때도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장기계약을 꺼렸는데 이유는 역시 검증된 과거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누군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선수 중 미국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의심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의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선구자가 없었다.

2009 WBC에 참가한 한국 선수 중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이 있다. 김태균, 이범호, 이용규, 김광현, 류현진, 정대현, 봉중근, 윤석민, 정현욱, 임창용 등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뛸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군문제를 해결했다.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좋은 조건으로 이적료를 지급하고 자유계약으로 풀어준다면 이들 중 한두 명은 미국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도 중요하기에 이들 모두가 미국에 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정말 가능성이 있는 한두 명(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가 미국에 올 수 있다면 성공을 거둘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한미 양구단의 적극적인 자세만 있다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여지는 있다. 만약 LA 다저스 구단과 한국 야구계가 박찬호에게 공을 들이지 않았다면 박찬호는 A급 메이저리그 투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어떤 선수가 적당할지는 연구 과제다. 메이저리그 구단이 눈여겨본 선수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김광현과 류현진이 일찍 메이저리그에 간다면 대성할 선수라고 생각한다. 아직 피칭이 단조로운 면이 있긴 하지만 공이 빠르고 어깨가 싱싱하기 때문에 잘 키우면 메이저리그에서 시즌 10승을 거둘 수 있는 투수들이다.

과연 한국 프로야구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성공시대를 열 수 있을까.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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